[Please find the English version below.]
앞으로 다섯 번에 걸쳐서 제가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들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해서 나누고자합니다. 우선 1) 첫번째로 제가 공부하는 실천신학이라는 분야의 근간을 이루는 실천 철학, 특별히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선(the Good) 개념 (The Idea of the Good in Platonic-Aristotelian Philosophy) 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서 세워진 실천 철학 개념이 어떻게 실천 신학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소개할 것이고, 2) 다음 서평에서는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르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가 이해하는 예수의 유대인됨과 소명이 어떻게 구약의 특수성과 신약의 보편성을 연결짓는 통일성을 담보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이해가 어떻게 인종주의를 넘어서도록 해주는 실마리를 제공하는지에 대해서 다룰 것입니다. 3) 세번째 서평에서는 실천 신학이 어떻게 신학교 교육의 현 패러다임에 도전을 주고 있는지를 에드워드 팔리(Edward Farley)의 테올로기아(theologia)를 중심으로 다룰 것이고, 4) 네번째에는 기독교 교리를 내러티브로 이해하게 될 때 교리가 정체성 형성을 위한 교육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다룰 계획이며, 5) 마지막으로 다섯번째 시간에는 앞으로 저의 공부 방향에 대해서 간략하게 나누고 이 시리즈를 마치려고 합니다.
실천 철학, 가다머, 그리고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선(the Good)
저는 현재 보스턴 대학교의 실천 신학 박사 과정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실천 신학이라고 하면 그 공부 내용이 성경 신학이나 조직 신학, 역사 신학에 비해서 어렵지 않고, 또 목회자가 실제로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필요한 분야들인 설교나 교육, 전도와 같은 분야들에 대한 응용 학문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최근 들어 실천 신학은 이런 전통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좀 더 포괄적인 그리스도인의 실천에 대한 연구를 주요 주제로 삼는 학문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실천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실천(practice) 개념이 있고, 그러한 실천 개념이 나오게 된 실천 철학이 있는데요. 흔히들 실천 철학을 이끄는 이론가들로 이 서평에서 소개할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를 비롯해서 알라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cIntyre), 그리고 요즘 특별히 각광 받고 있는 피에르 보르디외(Pierre Bourdieu)를 꼽습니다. 이 서평에서는 그 중 해석학이라는 철학의 한 분야를 이끌어오다시피한 가다머의 실천 철학, 특히 가다머가 재해석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선(the Good) 개념이 어떻게 실천 철학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실천 신학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가다머는 다른 대다수의 현대 철학자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것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두 철학자 사이의 공통점을 부각시키고, 두 철학자들에게서 자신의 해석학적인 실천 철학을 세워갈 이론적 토대를 찾아냅니다. 가다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실천적 지혜(phronesis)라고 불리우는 개념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에서 지식을 세가지로 분류합니다. 첫번째는 그가 이론적 지혜(episteme)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 지식은 변하지 않는 자연 법칙에 관한 지혜를 가리키며, 따라서 현대의 자연 과학적 지식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물론 현대 과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라보는 자연 현상이나 법칙에 대한 목적론적인 이해가 사라졌지만 말입니다.) 영어로는 know-why정도로 번역될 것 같습니다. 두번째로 기술적 지식(techne)이 있습니다. 이 지식은 인간의 삶에 필요한 도구적 지식으로서 물건이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단 터득하기만 하면 더 깊은 사고가 필요없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실천적 지혜(phronesis)가 있는데, 이 지식은 앞의 두가지 지식과는 달리 윤리적인 측면을 포함하고 있으며, 실제로 현장에 뛰어들어서 삶의 문제에 대면하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지혜입니다. 따라서 이 지식은 이론적 지혜(episteme) 처럼 복잡한 추상적 사고로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한 번 터득하게 되면 더 깊은 사고를 할 필요가 없는 기술적 지식(techne)과도 다릅니다. 가다머가 phronesis 개념에 대해서 기여한 주된 부분은 이 개념을 해석과 연결시킨 것이었습니다. 즉 실천적 지혜를 얻기 위해서 삶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게 될 때, 그렇게 얻게 되는 지식은 본질적으로 해석적이라는 것이 가다머가 발견한 주요한 통찰이었고, 그렇게 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phronesis는 가다머를 통해서 해석적 지혜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phronesis 개념이 해석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이전에, 즉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이전에, 그러한 실천적 지혜의 존재적 본질의 토대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먼저 제기되어야 하는데, 가다머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선(the Good) 개념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가다머에 의하면,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theory of the idea)은 단순히 현실 세계의 모든 개체들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이데아(idea) 세계에 대한 비전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많은 20세기의 플라톤 사상 연구자들이 이러한 이데아 세계에 대한 비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에 근거해서 이데아 이론이 현실 세계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현실 세계를 오히려 이데아 세계에 비해서 하등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나타났지만, 가다머는 이러한 해석을 반박하면서, 근본적으로 플라톤은 이데아 이론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결국 현실 세계의 각 개체들(그것이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간에)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음을 밝히면서 이데아 이론의 현실화와 구체화를 추구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데아 세계와 현실 세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얽혀 있다는 것이 그가 주장한 바입니다.) 그리고 가다머가 이해하기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대한 자세한 관찰과 그를 통한 탐구의 구체화라는 이 부분을 서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비록 가다머의 스승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에 대한 비판에 근거해서 (즉 현실 세계와는, 특별히 실천적 지혜와는 별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똑같이 플라톤을 비판하긴 합니다만, 가다머는 자신의 문헌학자(philologist)로서의 훈련을 통해서 그러한 고대의 텍스트들을 읽어내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잘못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플라톤을 온전히 이해한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서 플라톤을 읽어낸 하이데거 또한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지요.) 플라톤에게도 phronesis 개념이 존재하며, 플라톤의 phronesis 개념은 이데아 세계의 현현으로서의 현실 세계에 대한 고찰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비록 phronesis 개념에 대한 힌트를 우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얻긴 했지만, 플라톤 텍스트를 다시 읽음으로서 근본적으로 두 사상가의 공유점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선 개념입니다. 그리고 선 개념이 펼쳐질 때 필연적으로 대화(dialogue)와 변증(dialectic) 개념이 등장합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들에서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서 대화라는 형식으로 논의를 진행시키는데, 대화를 통해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목표하는 바는 자기 성찰과 자기 이해이며, 궁극적으로는 지혜에의 추구입니다. 가다머는 결국 플라톤이 대화를 통해서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빌어서 하고자 했던 말은 철학이란 대화를 통해서 어떤 것인 선한 것인가, 특별히 인간의 삶 속에서 선한 것이란 어떤 것인가를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선을 추구하는 지혜를 얻어가는 것을 철학의 최고 목표로, 또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가다머에 따르면 플라톤 사상 체계에서 이데아 세계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하이데거가 이해한 것과는 달리 현실 세계와 좀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현실 세계를 통해서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삶에 선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나가는 작업을 통해서만 닿을 수 있는 것이기에, 또한 그러한 작업은 오직 대화를 통한 변증(dialectic)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이러한 대화와 변증을 통해서 선에 이르는 길은 생각했던 것만큼 윤리적인 측면에서 그치지 않으며, 오히려 존재의 본질 자체와 좀 더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말하자면, 선 개념은 본질과 존재가 우리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통로이자 그러한 본질과 존재의 본래적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가다머의 견해입니다.
제가 가다머의 선 개념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제가 공부하는 실천 신학의 이론적 토대가 얼마나 서구 철학의 근본 뿌리와 맞닿아 있는지에 관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이차적으로, 그리고 좀 더 저의 삶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면에서 좀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연구가 어떻게 하나님을 추구하는 지혜로운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그래서 그러한 삶이 어떻게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실천 신학이라는 분야의 구체적인 열매로 드러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예수의 유대인 되심과 인종 차별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LIKEELLUL
In the following five pieces, I will share with you what I have studied thus far. First, I will share what practical philosophy is as the foundation of practical theology, particularly drawing upon Hans-Georg Gadamer’s understanding of the Good in Platonic-Aristotelian philosophy (The Idea of the Good in Platonic-Aristotelian Philosophy). The next piece will be about how Hans Urs von Balthasar’s understanding of Jesus’ Jewishness and his mission-oriented identity would warrant the particularity of Israel and the Old Testament on the one hand, and the universality of the church and the New Testament on the other, enabling the Christians to overcome racist tendency whatsoever. In the third piece, I will discuss how practical theology challenges and demands a certain revision (or even transformation) in the reigning paradigm of theological education, centering on Edward Farley’s Theologia. In the fourth essay, I will show how Christian doctrine, when narrativized, could be of help for educating for identity-formation. In the last piece of this series, I will share where my studies are moving in light of all the reflections thus far.
Practical Philosophy, Gadamer, and the Good in Platonic-Aristotelian Philosophy
I am currently studying in the practical theology doctoral program at Boston University. Oftentimes people regard practical theology as a secondary status academic field, in comparison to first-rate theological disciplines such as systematic theology, historical theology, and biblical studies. Moreover, practical theology is a field concerned with the minister’s practical tasks in the running of the church. However, practical theology of recent trend tends to go beyond this traditional conceptualization, making its academic abode in the topic of practice. The concept of practice derives from practical philosophy, whose three primary theoretical architects are Hans-Georg Gadamer, Alasdair McIntyre, and Pierre Bourdieu, whose popularity among scholars is especially growing of late. In this essay, I will discuss Gadamer’s practical philosophy in relation to the Good in Platonic-Aristotelian philosophy. Furthermore, I will also discuss how this understanding of the Good is of help for the furthering of practical theology.
Above all, unlike many modern philosophical critics pronouncing the differences between Plato and Aristotle, Gadamer pronounces what they share in common, thereby grounding his practical philosophy. For Gadamer in this regard, the most important concept is the Aristotelian phronesis (practical wisdom), which Aristotle divides knowledge into three kinds. The first is what he calls episteme, wisdom about the unchanging nature, corresponding to the natural sciences in modern society (Of course in modern science there is no teleological understanding of laws and rules of nature.) It is perhaps a know-why regarding how the nature works. The second is techne. This is the branch of knowledge to do with instructional and technological understanding, which, once acquired, no longer requires any further thinking, but repetition. The last is phronesis, which requires people to plunge themselves into concrete situations, and face whatever problems they have to resolve. Therefore, this knowledge, unlike episteme, cannot be obtained through abstract thinking only, nor is it like techne in the sense that it constantly demands adaptive thinking into situations and ever-changing circumstances. Gadamer’s primary contribution to the Aristotelian phronesis was to connect it to the task of interpretation. In other words, when one actively participates in whatever happens in one’s actual life, the knowledge one gets to yield through such participation is inherently demanding interpretation of many factors, such as one’s identity, the circumstances one is in, and how to deal with the given circumstances. This is how the Aristotelian phronesis is given rebirth to through Gadamer.
However, what needs to be remembered is that phronesis needs a pre-understanding of human existence, i.e., what kind of world we are living that makes it possible for us to seek practical wisdom. Gadamer finds the answer to this question in the notion of the Good. According to Gadamer, Plato’s theory of Ideas is not just about the world of Ideas containing the most idealistic things, which this world is nothing but its images. Although many Platonic scholars dismiss the theory of Ideas as not much relevant to the real world, relying on Aristotle’s critique of Plato. Gadamer refutes this idea, saying that Plato is fundamentally in agreement with Aristotle in the sense that the world of Ideas could be found and investigated only through the empirical and concrete world. (to be precise, the world of Ideas and our world are inextricably related to each other that it is hard to distinguish one from the other.) In Gadamer’s opinion, Plato and Aristotle share this understanding of the world studied through the empirical and the concrete.
Although Gadamer’s teacher Heidegger relied on Aristotle’s critique of Plato (that is, the world of Idea has little to do with the empirical and concrete world, and particularly with phronesis), Gadamer read such ancient texts by the skills he acquired through training as a philologist, saying that while Aristotle did not misunderstand Plato, he did not manage to fully understand Plato either. (which, therefore, Heidegger is equally guilty of this, since Heidegger relied on Aristotle in his reading of Plato) Plato has his own notion of phronesis, which encompasses both the world of Ideas and the empirical, concrete world. Thus, although Gadamer first got a hint about phronesis from Aristotle, he still plodded through Platonic texts to yield the commonalities between the two thinkers, which is precisely where the Good comes in, accompanying dialogue and dialectic. Plato in his books makes Socrates his starring actor, and unfolds his arguments through dialogue. What Socrates aims at in these dialogues is search for wisdom via self-reflection and self-understanding. Gadamer argues that what Plato was trying to say through the mouth of Socrates was that philosophy is constantly in search of wisdom, particularly what is good for human life, and that the ultimate goal of philosophy is to seek wisdom in pursuit of the Good. As has been aforementioned, Gadamer thought that in the Platonic corpus the world of Ideas is closely connected to the empirical, concrete world, and the world of Ideas is searched through investigating into the concrete and the empirical. Such task is done through the dialectic of self-examination; therefore, the ways to the Good is not confined to ethical aspects, but reaching deeper through the ontological aspects of the world. As it were, the notion of the Good functions as the channel through which the Being and beings are not only closely connected together, but also becomes the direction towards which Being moves toward.
What I have learned through Gadamer’s reinterpretation of the Good is primarily that the theoretical foundations of practical theology is deeply rooted in the Western philosophical tradition. But secondarily speaking, I have also taken it important in my further studies that this research of practical theology is of help for the life of wisdom in pursuit of God. Next piece will be about Jesus’ Jewishness and racism within the church.
LIKEELL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