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 – 연결과 소통을 향하여
박사과정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학위논문이전에 단독저서를 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논문을 작성하는 그 바쁜 시간을 쪼개어 뭔가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버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이 학위논문의 내용과 상당히 다른 것이라면 더더욱 흔치 않은 일이다. 이럴 경우 두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1] 이 사람 미쳤나? 박사학위 포기했나? [2] 이 사람 천재인가? 400페이지가 넘는 책을 학위논문을 쓰면서 쓰다니!
20년 가까이 형-아우로, 신학적 동지로, 그리고 친구로 저자를 알아왔기에 나는 이 두가지 질문에 대해서 답할 수 있다. [1] 김상일은 미쳤다. 그런데 박사학위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다만 팀 켈러라는 목사에 미쳤을 뿐이다. 사람이 미치면 뭔들 못하겠나. 그것은 자연스럽게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2] 천재여서 쓴 것이 아니라 미쳐서 썼다. 김상일은 이 책을 오랫동안 구상하였지만 정작 쓰는데는 채 일년이 걸리지 않았다. 미친 듯이 썼고, 즐거워하며 썼다. 그것은 저자에게만이 아니라 독자에게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저자가 미친 듯이 쓴 글에는 글을 이끌어가는 강력한 중심축이 있고, 그것이 독자에게 명확하게 전달되고 독자의 마음을 시원케 하기 때문이다. 하나마나한 미직지근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책은 독자에게 죽음과 같은 권태와 피로를 안겨주지 않는가. 이 책은 한 걸출한 목회자의 전체 사상을 파악하고 그것을 소개하고자 하는 저자의 존경, 사랑, 열심이 흠씬 묻어있다. 미쳐서 쓴 책은 독자를 흥분시키기 마련인데, 김상일은 치밀하고 충실하게 켈러를 분석하고 소개하기까지한다. 이책은 분명 좋은 책이다.
그런데 읽어보지도 않고 제목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1] 또 미국 교회 얘기냐? [2] 언제까지 수입신학에 의존할거냐? 그간 한국 교회와 신학은 미국 기독교의 복사판이라할 정도로 북미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팀 켈러를 읽어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김상일의 책을 읽어야 할 더 큰 이유가 있음을 설명하겠다.
책의 제목은 “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이지만 켈러가 한 작업은 분명 신학적이라기 보다는 목회적이다 (양자를 분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는 뉴욕 멘하탄의 특정한 회중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회중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의 문화를 복음의 능력으로 바꾸려 지난 20여년간 일했다. 그래서 이 책은 “팀 켈러의 목회적 비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김상일은 실천 신학자답게 켈러의 목회적 비전을 떠받치고 있는 신학적 기초와 체계를 훌륭하게 꿰뚫어 보았고, 그것을 매우 정교하게 설명해 내었다.
다시 앞서 제기한 두가지 선입견으로 돌아가보자. 미국 목회자에 대한 책이 필요한가? 켈러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이유는 그가 목회를 성공적으로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상에 성공한 목회자는 많다. 오히려 그가 우리, 특히 목회자들에게 유익한 이유는 복음이 제시하는 온전한 비전을 이루기 위한 신학적 기초와 구체적인 전략을 켈러가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목회적 비전 (혹은 목회철학)은 [1] 상당히 개교회 중심적이고; [2] 추상적이다. 구호나 프로그램을 넘어 어떤 체계라고 부를만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다. 조심스럽게 말해,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비전은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뭐, 그것도 좋다. 교회가 약한 것이 뭐가 좋겠는가? 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뭐 그리 나쁘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온전히 반영하고 있는가라고 물으면 쉽게 답하기 어렵다. 예를들어 에베소서에서 그리는 복음의 그림은 인종간의 화해, 온 세상의 그리스도안에서의 충만함과 통일됨등 개교회를 넘어선 세계비전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목회자 중 이런 비전을 목회를 통해 꾸준히 시도한 경우는 분명히 여럿있다. 그러나 그것이 켈러와 같이 견고한 성서적, 신학적인 기초위에서 건축되고 동시에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한 경우는 많지 않다. 두번째 한계는 한국교회의 목회철학에는 목회적 비전을 이루어갈 구체적인 전략이 대부분 부재하다는 것이다. 교회 홈페이지에서 발견되는 목회철학은 실제 목회와 분리되어 있거나, 전략이 있다하더라도 프로그램을 어떻게 하겠다는 식의 접근에 그친다. 쉽게말해 총론은 있는데 각론이 없고, 돌격 앞으로의 구호는 있으나, 실제로 전투를 이길 전략과 리소스는 모호하다. (다시한번, 여기서 말하는 전략은 프로그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반해 켈러의 목회적 비전의 가장 큰 테두리에는 사회비전이 있다. 그것은 교회 안의 신자들의 사회가 아닌, 세상을 향한 복음적 비전으로 김상일의 책에서 사회적 상상력이라고 표현된 것이다. 이 원대한 비전을 이루기 위한 전략은 다름아닌 마음의 변화에서 시작한다. 특히 켈러는 멘하탄의 회중들의 마음이 전통적인 복음 제시로는 잘 움직이지 않음을 간파하고,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두가지 기제를 분석한다. 하나는 우상이며, 다른 하나는 정체성과 자아상이다. 켈러는 한편으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섬기고 있는 우상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갈망하는 정체성과 자아상을 복음 안에서 참으로 발견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회중의 마음이 복음을 통해 변화에 이르는 길을 모색한다. 이 길은 그의 설교와 저서 전체를 관통한다. 켈러는 이 길을 찾기 위해 찰스 테일러, 로버트 벨라,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근현대의 사상가, 신학자들과 긴밀하게 대화하는데, 김상일은 3-4장을 통해 이 대화의 과정이 어떻게 현대인의 마음에 복음을 증거할 전략으로 귀결되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켈러는 개인의 변화를 넘어 회중이 살고 일하는 공적공간에서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소위 공적신앙과 사회정의의 영역이 그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대한 켈러식 해석이다. 켈러는 복음이 공공 영역에서 다른 어떤 사회적 상상력보다 인간번영에 도움이 되는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증하며, 복음과 경쟁하는 다른 사상과 종교들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렇게 함으로 사적 영역으로 퇴각해버린 신앙을 공적 영역에서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그것은 말로 공적인 영역에서 증인으로 살라는 식의 구호와는 차원이 다른 전략적 접근이다. 이런 부분을 드러내면서도, 김상일은 6-7장을 통해서 켈러가 제시한 마음의 변화가 어떻게 궁극적으로 공적영역의변화와 연결되는지를 통합적으로 보여준다. 즉, 마음-개인-교회-사회라는 전체의 그림과 그 내적 정합성을 잘 짚어낸다.
켈러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메뉴얼로서의 기능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교회와 회중이 각기다른 특정한 삶의 자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어떤 목회적 전략도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추종과 모방을 반복하고 있지만). 켈러는 우리에게 개교회를 넘어 공적 영역에까지 확장되는 목회적 비전이 견고한 신학적 기초위에서 구체적 전략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체의 그림을 (내가 아는한) 거의 유일하게 보여주었다. 교육은 선례와 모델을 필요로한다. 학습한 내용이 현실에서 이루어진 결과를 보고 학습자는 그것이 실제로 어떤 과정을 통해 구체화되는지를 가늠할수 있게된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자신의 그림을 그려갈 수 있다. 김상일은 켈러가 그린 그림을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동시에 거기서부터 독자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돕는다. 자칫 켈러의 글을 읽고 감탄하거나 이곳 저곳을 부분적으로 모방했을 독자들에게 목회적 비전의 전체 형세를 보여줌으로써 켈러가 훨씬 건강하게 읽히고 수용되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김상일의 책을 읽어야할 이유이다. 켈러를 해석/평가한 책이 영미권에 이미 나와있으나, 김상일이 이루어낸 조감도의 역할을 충실하게 한 책이 과연 있는지는 의문이다. 켈러의 저서나 설교를 이미 접한 독자라면 김상일의 작업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족.
팀켈러의 목회적 비전이 가장 잘 응축된 곳은 그가 쓴 ‘교회 개척 메뉴얼’이다 (아마도 센터처치의 기초가 된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메뉴얼은 letter지 사이즈 (A4)에 깨알같은 글씨로 기록된 250페이의 문서로서 켈러와 그의 동역자들이 리디머 교회를 개척하면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함께 정리하고 실험한 목회비전, 철학, 그리고 전략의 집약체이다. 이 문서는 켈러가 추구한 목회적 비전을 구체화하기 위한 성경적이고 신학적 기초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을 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