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 국민의 고통에 다가서다—가죠 기타모리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가죠 기타모리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은 지극히 일본적이면서도 지극히 동양적인 신학을 말합니다. 지극히 일본적이고 지극히 동양적인 신학은 어떤 신학일까요. 다름 아닌, 동시대 일본 국민의 애환과 정서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그들의 삶에 전해지는 복음 메세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신학이 바로 그런 신학일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타모리가 역사적 정통 기독교의 복음 메세지를 상황에 맞게 전하기 위해서 왜곡하거나 타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어쩌면 기타모리의 신학적 작업은 팀 켈러가 말했던 상황화(contextualization)라는 작업과 (비록 구체적인 방법론이나 목표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더라도) 여러 면에서 같은 정신을 추구하는 면이 있지 않을까 싶고, 바로 그런 때문에 기타모리가 추구했던 지극히 일본적인 신학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기타모리 신학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아픔이 있습니다. 왜일까요. 기타모리가 처한 상황은 2차 세계 대전 전후, 패망한 일본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의 일본은 전범국이며, 뭔가 잘했다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일본이 전범국인 까닭은 지배욕으로 가득한 지도자 계층 때문이지, 그 나라 백성이 특별히 더 사악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래서 기타모리는 후대 비평가들에게 ‘제국주의 일본의 야욕을 정당화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합니다만, 그런 비판은 기타모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비판입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 이 서평에서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서평에서는 기타모리가 당대의 일본 국민들의 삶의 어떤 점에 귀를 기울여서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을 창안했는지에 대해서 얘기하기 위해서 다음의 세가지 내용을 다루려고 합니다. 첫번째, 기타모리가 말했던 구체적인 일본 국민의 상황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두번째, 왜 기타모리가 당대의 서구 신학을 그대로 일본 국민들에게 전하는 대신, 일본의 상황에 맞는 신학을 설파함으로써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지를 살펴봅니다. 세번째, 일본 국민의 상황과 서구 신학의 일본 상황에 대한 부적합성을 바탕으로 기타모리가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을 어떻게 주창했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본 국민들의 쓰라림에 귀기울이다
우선 기타모리가 말했던 구체적인 일본 국민의 상황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기타모리는 자신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이 구체적으로 전후 일본 국민의 패배감과 상실감에 대해서 위로하려는 목적을 가진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조금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일본 국민들의 삶의 이야기와 정서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어떤 ‘나라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모습을 파악하며 이것을 우러러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이 가진 마음이다. 그 ‘마음’은 감각이라고도 할 만하다. 그것은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며, 게다가 ‘정신’마저도 아니다! 정신보다도 더 깊게 구체적이 되는 것 곧 감각이다. ‘정신’은 어쩌면 나라 사람들 안에서도 상층인 자, 교양 있는 자, 수양을 쌓은 자만이 소유하고 있지 서민의 것이 아닌 경우도 있다. 서민에게 ‘정신’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은 아직 참으로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다. (263)
여기서 기타모리는 학문 체계로서의 신학이 흔히 빠지는 엘리트화의 오류를 적극적으로 피하고자 합니다. 그가 찾아내고자 하는 일본 국민들의 마음은 어떤 고상한 일본적 정신이 아닙니다. 일본적인 사상도 아닙니다. 그가 찾아내고자 하는 일본 국민들의 마음은 그렇게 가르쳐야 하거나 고양해야 하는 것이 아닌, 그 당시 일본 국민들의 마음 속에 살아 숨쉬며 그들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타모리는 이런 일본 국민들의 마음을 어디서 찾으려고 했을까요? 그에 대해서 기타모리가 찾아낸 답은 문학이었습니다.
나는 일본의 마음을 탐구하고, 우선 그것을 서민의 마음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 믿으면서, 다음으로 그 서민의 마음을 일본의 고전적 연극 속에서 보고자 했다. 서민의 마음을 일본의 고전적 연극이 대표하고, 서민의 마음 속에 일본적 사유의 전제인 감각으로서의 마음이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264)
그래서 기타모리는 고전적 연극을 통해서 일본 국민들의 마음을 살펴보고자 하며, 그 결과 기타모리가 찾아낸 것은 인간 관계의 ‘쓰라림’이라는 정서가 일본 국민들의 마음 깊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쓰라림’이란 무엇일까요? 기타모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인간 관계는 ‘쓰라림’이라는 일본어 특유의 단어로 표현되는 것 같다. (쓰라림은 괴로움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다) 일본적 인간의 깊이는 이 ‘쓰라림’에서 극치를 이룬다. 일본적으로 말해 깊이 있는 인간, ‘물정을 아는’ 인간은 이 쓰라림을 아는 인간이다. 쓰라림을 모르는 인간은 얕은 인간이고 ‘맛이 없는’ (재미없는) 인간이며, 요컨대 일본인답지 못한 인간이다. 그리고 거리의 백성쪽이 상층의 인간보다 오히려 이런 점에서 감각이 예민하다. (267)
비록 같은 동양권이긴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서평자인 제가 기타모리가 말하는 ‘쓰라림’이 어떤 것인지 백퍼센트 공감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기타모리는 일본 문화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말하는 일본 국민의 이런 쓰라림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예시를 듭니다. 그리고 그 예시는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일본 비극의 근본인 ‘쓰라림’은 타자를 사랑해서 살리기 위해 자기를 괴롭히고 죽게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를 괴롭히고 죽게 하는 데서 실현된다. 게다가 그 괴로움을 자신 속에서 간직해서 견디려고 하지만, 그 노력의 틈으로 새어나오는 통곡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이 통곡의 소리를 들을 때, 일본의 백성은 그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일본 비극의 근본 성격은 ‘쓰라림’에서 극치를 이룬다. 정작 이 ‘쓰라림’을 이제 조금 일반적인 단어로 고쳐 말하면, 아픔이란 단어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일본 비극의 유일한 관심사인 아픔이야말로 우리의 주제인 하나님의 아픔에 가장 깊이 호응한다는 것이다. (271)
부모가 다른 이를 위해 자식을 내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 그리고 결국 자식을 내어주었을 때 느끼는 정서를 기타모리는 ‘쓰라림’이라고 부르며, 그걸 일반적인 단어로 바꾸면 ‘아픔’이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마도 기타모리는 일본의 수많은 부모들이 전쟁을 위해서 자신들의 아들들을 나라에 바쳐야 했던 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기타모리는 성경에서 바로 하나님께서 이런 부모님이셨음을 발견합니다. 그가 이런 하나님의 아픔을 발견한 성경 구절은 예레미야 31:20과 이사야 63:15입니다. 특히 이 서평에서는 예레미야 31:20에 대해서 기타모리가 받았던 충격에 대해서 책의 후반부에 기술하는 부분을 옮겨 보겠습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20) 예레미야 31:20속에서 이상한 어구를 발견한 이래, 나는 밤낮으로 이 어구를 계속하여 생각해왔다. 그것은 나에게 문자 그대로 이상한 말이었다. 그 어구는 예레미야 31:20에서 “나의 창자가… 아프다”로 번역되고… 예레미야 31:20의 hamu meai를 구성하는 각각의 두 단어는 완전히 공통이다. 곧 양자가 공히 명사 meaim과 동사 hamah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는 창자를 뜻하고, 마음이 존재하는 장소, 나아가 ‘마음’의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경우 거의 문제가 없다. 문제는 후자인 동사 hamah에 있다… 이 단어는 인간의 (그리고 하나님의!) 심적인 상태에 대해 사용된다… 이 곳에서 예레미야는 예언자가 시편 저자의 마음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실이 하나님에게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본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떠한 사실인가? 말하자면 아픔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아픔이라는 사실! (303-307)
이런 하나님의 ‘쓰라림’ 혹은 ‘아픔’은 곧 성경이 증언하는 바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셨음에도 그들의 불의를 미워하실 수 밖에 없기에 겪어야 했던 깊은 내적인 고통을 표현하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그 분은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는 당신의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 하십니다. 기타모리는 바로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아픔이 일본 국민들의 마음의 감각인 ‘쓰라림’과 공명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벗이여! 이 곡조는 아니오! (서구 신학의 부적합성에 대하여)
아래에서 더 자세히 얘기할 것입니다만, 이런 하나님의 아픔에 깊이 파고 들어가는 신학은 서구 신학 중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서평에서 다루기로 했던 두번째, 즉 왜 기타모리가 당대의 서구 신학을 그대로 일본 국민들에게 전하는 대신, 일본의 상황에 맞는 신학을 설파함으로써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의 첫장에서 기타모리는 현대 신학의 큰 두가지 흐름인 칼 바르트(Karl Barth)의 소위 말씀의 신학과 함께, 현대의 신학적 자유주의가 바라보는, 고통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신학 양자를 모두 비판하면서 그들 신학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의 독특한 ‘쓰라림’의 정서 또한 전혀 담아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첫째, 30년전 이 세계의 비극(제 1차 세계 대전)을 눈앞에 보면서 태어난 (바르트) 신학의 모티프는 무엇이었는가? 그 신학이 보았던 하나님은 인간과 ‘대립’(Gegenuber)하는 하나님이었으며, 그 신학의 시종일관된 모티프는 ‘하나님과 인간의 원리적 대립’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 (바르트) 신학에서 ‘은총’이란 무엇인가? ‘은총’이란 하나님이 자기 행위를 배타적으로 스스로 홀로 말하는 것이다. 그 신학에서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하나님의 익명에 대한 경외이며, 하나님과 인간이 또 하나님과 세계가 질적으로 다름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자체가] 세계의 전환인 부활에 대한 긍정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아니오! 를 긍정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며 멈추어 서는 것이다… 대립. 배타성, 질적 다름.부정. 제 1계명과 같은 표현에서 꾸준히 주장되는 모티프와 감싸 안으시는 하나님이란 복음의 모티프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37-39)
마찬가지로 기타모리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 하나님의 사랑이 그려내는 희망과 긍정성에 눈 먼 나머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희생시켜야 하셨던 그 아픔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둘째, 일찍이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은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개념이 사랑의 개념 속에 표현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기쁨으로 충만했다. 우리도 가능하다면 리츨과 그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소식 이상으로 기쁜 소식이 있을까! 슐라이어마허, 리츨, 헤르만, 하르나크 등은 모두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이란 소프라노를 소리 높여 노래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프라노를 듣고 ‘벗이여! 이 곡조는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슬퍼한다… 그들(현재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보았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픔이 된 중보자(mediator)를 굳이 피하면서 만들어낸 직접적인(immediate)하나님의 사랑임에 틀림없다. (39-41)
그래서 기타모리에게는 서구 신학을 있는 그대로는 따르지 말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생깁니다. 바르트의 신학도, 현대 자유주의자들의 신학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죄인들을 위해서 희생시켜야 했던 그 아픔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리고 기타모리는 일본 국민들을 위한 신학, 하나님의 아픔을 드러내는 신학, 예레미야 31:20이 말하는 신학을 주창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 작업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우리가 이 서평에서 마지막으로 할 세번째 작업입니다.
하나님의 아픔에서 우리의 아픔으로, 우리의 아픔을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제 기타모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의 핵심 모티프를 살펴볼 준비가 되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아픔은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진노와 피터지게 싸울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생겨난 부산물이며, 동시에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선하시며 온전하신데 반해, 세상은 타락했으며 자기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지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사랑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성경에서 이미 증언하신 바와 같이 스스로를 사랑이라고 부르셔놓고 (요일 4:8) 이후에 스스로가 사랑이 아니라고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아픔을 겪으십니다. 이런 까닭에 기타모리는 하나님의 아픔이 하나님의 본질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여기서 본질이라는 말은 존재론적인 본질, 변하지 않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타모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본질인 사랑으로 세상을 감싸안으실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경험하시는 것이 바로 아픔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타모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의 아픔에 기초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233). 그러한 사랑을 기타모리는 사랑의 세가지 질서로 설명합니다. 첫번째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며, 두번째는 하나님의 아픔이고, 세번째는 하나님의 아픔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첫번째, 직접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장애도 없이 직접적으로 대상에 쏟아 붓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그 사랑을 받기에 어울리는 자이다”(233) 하지만 피조계 중 어느 누구도 이런 사랑을 받기에 어울리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픔을 겪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두번째 질서인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둘째 사랑의 질서인 하나님의 아픔은 이중의 의의를 가진다. 우선 그것은 하나님이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기 위하여 사랑하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픔이며, 다음으로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독생자를 괴로움 속으로 보내어 이를 죽게 하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픔이다… 둘째 사랑의 질서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상실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괴로움과 죽음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점이다. (239)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아픔에 기초해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는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당신 안에 있는 죄를 향한 진노를 불같이 발하시는데, 또한 그렇게 불같이 발한 진노를 죄인을 사멸하는데 사용하시는 대신, 당신 안에 있는 사랑으로 감싸 안으십니다. 하나님의 아픔은 이렇게 태어나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세번째 질서인 아픔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다루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픔이 이토록 중요하다면, 그 아픔은 그 분을 따르고자 하는, 그 분을 닮고자 하는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제가 기타모리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초점을 맞추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고, 이 서평을 읽는 독자들 또한 초점을 맞추었으면 하는 부분도 이 부분입니다. 기타모리는 우선 하나님의 아픔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아픔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접점이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픔을 우리 인간에게 전하여 나타내려 하실 때, 그는 우리 인간의 아픔을 통하지 않고는 이것을 나타내실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아픔에 대한 증거로서 우리 아픔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이 때 우리의 아픔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아픔이 하나님의 아픔에 대한 증거로서 섬기기에 이를 때, 우리의 아픔은 빛으로 화하며 의의도 획득하고 생산적이 되는 것이다. (101-102)
여기서 기타모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번째, 우리의 아픔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픔을 소통하는 통로가 된다. 두번째, 우리의 아픔이 우리의 자기 중심성의 욕구와 소망이 채워지지 못해서 생긴 아픔으로 영원히 남겨지는 대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기에 필연적으로 받으셨던 아픔의 형상이 될 수 있다면 그제서야 우리의 아픔은 단순한 세상의 타락의 표시를 넘어서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모두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픔을 겪을 때 우리는 우리의 아픔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이며, 이런 경향은 우리의 자기 중심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이지요. “내가 얼마나 힘든지, 내 상처가 얼마나 큰지 너희들이 알기나 해? 너희 따위는 내 깊은 상처를 절대 몰라. 알 길이 없지 흥”하는 말이 튀어나올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깊은 상처를 경험하고 그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일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의 아픔에 집중한 나머지 자기의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은 없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을 경험합니다. 바로 인간의 자기 중심성이 그가 겪는 아픔을 통해서 극대화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기타모리는 이런 종류의 아픔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아픔이며, 약간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기적인 아픔, 사랑을 담아내지 못하는 아픔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프고 힘들 때, 우리가 아프고 힘든 그 궁극적 원인이 되는 세상의 타락과 죄악을 해결하시고자 세상을 기꺼이 감싸안으심으로써 아픔을 겪으신 하나님의 아픔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의 아픔이 하나님의 아픔으로 승화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삶의 방향을 만들어갈 수 있다면, 그 때 우리의 아픔은 더 이상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아픔이 되는 것에서 벗어나 치유자의 아픔이 됩니다. 이 대목에서 유명한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가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서평을 마치며-불교의 통찰을 신학화하다
기타모리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은 서구 신학과는 달리 불교의 중요한 테제 중 하나인 아픔과 고통을 신학화하는 책입니다. 불교의 중심 가르침 중 하나는 인생은 고통이며, 고통은 어떤 관계나 대상에 대한 지나친 애착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기타모리는 이 가르침을 역으로 뒤집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이타적인 사랑을 하시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이타적인 사랑 때문에 아픔을 겪으셨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아픔에서 시작해서 그 아픔이 하나님의 아픔을 볼 수 있는 통로가 되게 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우리의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픔을 섬기는데까지 나아가는 것, 즉 하나님께서 아픔을 겪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세상의 회복과 용서를 위한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아픔을 승화시키는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책의 서문에서 기타모리는 자신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을 가지고 일본의 불교계와 대화를 계속적으로 시도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그를 통해서 어느 정도 불교계 인사들로부터 자신의 통찰이 불교적 사고에 끼칠 수 있는 잠재적 유의미성을 확증받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서평자로서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아시아인으로서 신학을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껏 아시아적인 신학을 해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는 많이 느꼈을지언정, 구체적으로 아시아적인 신학을 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역할 모델을 찾지 못했었는데, 기타모리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은 아시아인으로서, 무엇보다 한국인으로서 신학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새롭게 되새기게 해준 귀중한 책이었습니다. 이 서평을 읽으시고 나서 독자 여러분들 또한 기타모리 가죠의 책을 집어들고 읽어보실 기회가 되신다면 좋겠고, 그를 통해서 과연 21세기에 한국인으로서, 혹은 한국계 이민자로서 신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지신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