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연결과 소통을 향하여-브레네 브라운의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I thought it was just me)

 안녕하세요. 서평 쓰는 남자입니다. 오늘 서평할 브레네 브라운의 책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는 한가지 지향점을 꾸준히 밀어붙이는 책입니다. 그 지향점은 바로 어떻게 해야 연결과 소통이 일어나느냐입니다. 그래서 책의 서평 제목도 “연결과 소통을 향하여”로 달아 봤습니다. 사실 “연결과 소통을 향하여”라는 제목은 곧 CLC(기독교 문서 선교회)를 통해서 12월에 출간될 저의 신간 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Theological Vision of Tim Keller-Toward Connection and Communication)에서 가져오기도 했습니다만, 팀 켈러가 연결과 소통을 지향하는 만큼이나, 브레네 브라운 또한 연결과 소통을 지향하는 학자이자 대중 작가이기 때문에 이 제목을 그대로 브라운의 책에 붙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켈러가 신학적인 관점에서 연결과 소통을 지향한다면, 브라운은 심리학과 사회복지학이라는 관점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 다릅니다. 브라운의 책 전체를 꿰뚫는 전제는 ‘인간은 연결을 지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human beings are wired for connection)(285)는 신경 과학의 발견입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브라운은 1) 어떤 것이 연결을 막나, 2) 연결이 막히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3) 어떻게 해야 막힌 연결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그러므로 이 서평 또한 이 세가지 주제를 브라운이 어떻게 풀어가는지를 함께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어떤 것이 연결을 막나-문화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수치심 그물

 브라운에게 있어서 연결이 막히는 까닭은 개인이 스스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상적 자아가 얼마나 실현 가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이 꿈꾸는 이상적 자아의 기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개인은 스스로와의 연결에서 단절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고, 이럴 경우 생기는 감정을 브라운은 수치심이라고 명명합니다. 수치심은 보통 완벽주의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완벽주의는 스스로를 자신이 꿈꾸는 완벽함으로 밀어넣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스스로를 경멸하고 가치 없는 존재라고 판단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즉 수치심은 자기 가치를 격하시키는 감정입니다. 브라운은 수치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수치심은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받아들여질 만하지도, 소속감을 누릴만 하지도 못하다고 믿게 되는 고통스러운 느낌 혹은 경험을 가리킵니다. 여성들은 사회적-공동체적 기대치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서 충돌하고 경쟁하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수치심은 공포와 비난, 연결이 단절되는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30)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브라운이 연결이 막히는 까닭을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수치심의 정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수치심은 사회적-공동체적 기대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또한 현대 문화의 사회적-공동체적 기대치는 많은 경우 매스 미디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브라운은 말합니다. 그 결과 브라운이 수치심 그물(shame web)이라고 부르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이 수치심 그물은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각각의 개인에게 던지는 완벽주의에 대한 메시지가 다중적으로 겹쳐서 일어나다보니 한 영역에서 전달되는 완벽주의에 대한 메시지가 다른 영역에서 전달되는 완벽주의에 대한 메시지와 경쟁하거나 충돌이 일어나면서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개인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현상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여성들의 경우 육아와 가정 생활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문화 전반을 통해서 전방위로 계속해서 받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잡지나 TV, 그리고 SNS에 등장하는 여러 이미지들과 메시지들은 여성들에게 육아와 가정 생활을 완벽하게 해내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압박합니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 여성들은 완벽한 몸매를 유지해야 좋은 여성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 또한 현대 문화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전달 받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여기에 커리어가 있는 여성의 경우 커리어에서도 뒤쳐지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여성들에게 기대치로 작용합니다. 완벽주의가 이중삼중으로 사람을 붙잡는 모양새입니다. 브라운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자기에게 부여되는 기대치가 심하게 높고 지나치게 많은데, 그에 비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선택 사항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경우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합니다. 마치 나를 집어 삼키려고 몰려오는 파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느낌이랄까요. 이럴 경우 수치심이 더더욱 커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회와 문화 전체가 “저 정도는 해야 괜찮은 엄마고, 괜찮은 와이프고, 괜찮은 여자고, 또 괜찮은 직장 여성이라고 끊임없이 광고와 방송, 미디어를 통해서 말하는데, 나는 괜찮은 엄마도 아니고, 괜찮은 와이프도 아니고, 괜찮은 여자도 아닌데, 괜찮은 직장 여성까지 아닌데다가, 지금 내 상황에서 별로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연히 나는 정말 별 가치 없는 존재구나라는 마음이 커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사회-공동체적인 완벽주의적 기대치를 통해서 나 자신과의 연결이 막히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게 바로 수치심이 무서운 점입니다. 브라운은 이렇게 말합니다. “수치심이 상당히 강력한 이유 중 하나는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수치심의 능력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만 그런 것처럼, 그리고 우리만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처럼 만드는게 바로 수치심입니다” (9-10). 그리고 이런 수치심은 여러가지 다른 부정적인 감정을 낳고,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다시 끊어진 연결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연결이 막히면 어떤 일이 일어나나

 우리는 연결을 지향하도록 설계된 존재들입니다. 연결이 끊어지면 즉각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하게 되고, 그 때 느끼는 감정이 수치심이라고 브라운은 말합니다. 그런데 수치심은 다르게 정의하면 연결이 끊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너무나 흥미로운 점은, 나 자신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경험이 증가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연결을 경험하지 못할 확률이 커진다는 점입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느끼는 수치심을 피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그 경험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정말로 가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이런 면에서 참 중요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치 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만드는 그 경험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우리의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제공해 주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수치심을 느끼는 그런 경험들에서 비롯되지 않고,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애써 밀어내게 되는데요. 브라운에 의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밀어내면 낼수록 우리 안에서는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능력도 점점 더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의 스펙트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다른 이들이 느끼는 감정에도 민감해지게 되며, 다른 이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도 저절로 커집니다. 따라서 어쩌면 연결이 막혔다는 말은, 사실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의 그것보다, 우선은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연결을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브라운이 드는 예시 중 또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험담(gossping)을 하는 이유 또한 이렇게 연결의 끊어짐에서 비롯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브라운은 앨리슨이라는 여성의 예를 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앨리슨이라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을 감행한 젊은 여성과 인터뷰를 했을 때, 그 여성의 친구와 이웃들, 심지어 선생님들이 보여준 반응은 정말 소스라치게 섬뜩했다. 그 여성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 동안, 앨리슨은 외출할 때마다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는 경험을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어머니의 자살에 대해서 상당히 부적절한 것들을 묻는 사람들을 만난 적도 있었다. 처음에 앨리슨은 그런 반응이 말도 안된다고 느꼈다. 어머니의 자살이 자기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앨리슨은 알고 있었고, 자신의 어머니의 정신 질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지 못한다는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근거림이 계속되면서 앨리슨은 어머니의 자살이 자신 또한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는걸 믿기 시작했다. 이렇게 수치심은 앨리슨이 따돌림을 당한다고 느끼게 만들었고, 외로움을 느끼게 했다…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며, 그런 상황들은 우리를 우리 스스로가 가진 공포나 근심, 때로는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심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10-11)

 브라운이 하는 말은 이겁니다. 사람들이 누군가에 대해서 험담을 하는 까닭은, 험담의 대상이 되는 누군가가 겪는 끔찍한 경험과 연결되었을 때, 그런 경험은 아마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공포나 두려움, 혹은 수치심을 떠올리게 만들 것이고, 그들은 되도록 자신들이 직면해야 할 스스로의 공포나 두려움, 수치심으로부터 도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즉 다른 이들과의 연결은 나 자신과 직면하는 일을 뜻하며, 그런 직면을 되도록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앨리슨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겪는 경험이 끔찍한 것일수록 사람들은 그런 경험에 공감하는 일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공감할 경우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두려움은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확신하지 못하는, 그래서 수치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커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과의 연결을 끊어버리고, 대신 자신들이 끊어버린 연결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험담을 하면서, 험담이라는 공감대를 통해서 다시 경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어서 그런지, 저는 이 지점에서도 성경 말씀을 다시 한 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 12:15) 왜 그럴까요? 복음을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의 삶의 기반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들과 연결이 된다고 해도 그런 일들이 자신의 삶에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공포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이 그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이 그들을 어려운 일에서 면하게 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변치 않고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그들이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은 사람들이 대면해야 할 수치심에 맞서기 좀 더 쉽게 해주며,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이 변치 않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가 힘든 일을 경험한 사람들과 연결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자신의 기반이 흔들리는 경험을 상대적으로 적게 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이런 믿음이 쉬운 믿음은 아니며, 꾸준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숙하고 성장하는 경험이 늘어나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자신의 기반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상당히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의 기반이 내가 이루어 놓은 것들에 있으면, 내가 이루어놓은 것들이 무너져 버릴까 두려워서 힘들어하는 이웃들과 함께 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내 인생의 기반이 내가 이루어놓은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이루신 것들에 있다면, 이웃들과 한없이 연결된다고 해도 두려움은 상당히 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앙이 없어도 그런 연결을 잘 하는 사람들도 있고, 신앙이 있다고 해도 그런 연결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적어도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이런 신앙의 내적 논리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논리를 실제 체험으로 승화시키는 것임을 알고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막힌 연결을 다시 회복할 수 있나

 그렇다면 브라운은 어떻게 해야 연결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할까요. 말할 것도 없이 수치심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야 연결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브라운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브라운은 4단계로 이루어진, 수치심에 맞서는 방법을 이 책에서 설명합니다. 첫번째 단계는 스스로가 어떤 경우에 수치심을 느끼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며, 수치심을 느낄 때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브라운에 의하면, 우리가 수치심을 느끼는 영역은 상당히 다양합니다. 그래서 브라운은 수치심 카테고리라는 것을 만들었고, 다음의 영역들이 우리가 수치심을 느끼기 쉬운 영역임을 밝힙니다: 외모, 체형 이미지, 엄마로서의 삶, 가족, 자녀 양육, 돈과 직업,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건강, 중독, 섹스, 나이듦, 종교, 낙인 찍히는 것, 트라우마에 대해서 말하는 것 (275). 우리 모두는 이런 영역들 중 적어도 몇가지 영역에서 수치심을 다른 부분보다 더 많이 느낍니다. 브라운은 우리가 특히 어떤 면에서 수치심을 느끼는지, 우리가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기만 해도 수치심이 상당히 줄어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수치심을 느끼는 순간 거기에 대해서 성찰하면서 ‘아, 내가 수치심을 느끼고 있구나’라는 걸 인정하면 그 자체가 우리가 느끼는 수치심에서 한 발 떨어져서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한 발자국 떨어짐’은 수치심에 대한 회피와는 다릅니다. 비록 우리가 느끼는 수치심에서 한 발 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비판적 인식을 키우는 일입니다. 비판적 인식이란, 우리 스스로가 어떤 경우에 어떤 방식으로 수치심을 느끼는지를 인지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로 하여금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문화적, 공동체-사회적 기대치를 인지하고 그런 기대치를 차단하거나 필터링하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면, 나이듦에 대해서 수치심을 느낀다면, 일단 스스로가 그 주제에 대해서 수치스럽게 느낀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을 넘어서, 왜 그렇게 느끼게 되었는지, 어떤 메세지가 나로 하여금 그 부분에서 수치심을 느끼게 만들었는지를 역으로 추적해보는 것입니다. 이 단계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감정을 인지하고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문화와 사회 분석이라는 차원까지 나아갈 가능성을 농후하게 담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 해방 운동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기존에 브라운이 얘기했던 것들과는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실 더 좋았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 메세지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메세지가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의 어떤 면의 반영인지를 분석한다는 것은 감정이 단지 개인적이고 변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세번째와 네번째 단계는 우리가 느끼는 수치심에 대해서 생각하고 성찰한 것들을 스스로에게 말하고, 또 믿을 만한 공동체 안에서 나누는 일입니다. 브라운은 수치심에 맞서는 최고의 방법은 수치심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수치심은 숨는 속성이 있는데, 숨어 있는 수치심을 죽이는 최고의 방법은 밝은 곳으로 수치심을 끌어내오는 것이라는 겁니다. 너무나 타당한 주장이며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브라운이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도 인상 깊었습니다. 브라운은 여기서 우리 모두는 각자만의 연결 네트워크(connection network)를 필요로 하며, 그런 연결 네트워크를 통해서 우리가 느끼는 수치심을 계속적으로 폭로해야 점점 더 수치심에서 자유로워지며, 궁극적으로 더 많은 연결을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교회는 이런 면에서 어쩌면 최고의 공동체가 될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반으로, 스스로가 생각하는 못난 모습을 스스럼없이 나누고, 그런 나눔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때 받아들여짐과 인정함이 있는 공동체. 사실은 그게 바로 교회여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네 교회의 현실은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사랑에 인생의 기반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실 교회 안에도 그렇게 많지는 않기 때문일 겁니다. 팀 켈러가 말했듯이, 우리는 비록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복음을 진짜로 믿지는 않습니다. 만약 복음을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수치심에서, 공포에서, 근심에서, 점점 더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도 더 많은 연결을 경험하게 되고, 따라서 다른 이들과도 두려움이나 주저함 없이 더 많은 연결을 경험하게 될텐데, 우리네 교회 안에서 연결의 경험이 적다는 의미는 그만큼 우리가 아직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제대로 경험한 적도 없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전체적으로 브라운의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좋은 공동체 만들기 매뉴얼처럼 읽어도 좋겠다 싶은 책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내면을 살펴야 합니다. 단지 우리 자신의 정신 건강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 우리 스스로와 연결되는 경험이 많아져야 다른 사람들과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더 많이 연결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브레네 브라운의 저서를 모두 읽었습니다. 비록 브레네 브라운 서평 시리즈는 모두 마치게 되지만, 저는 앞으로 한두차례 정도 브레네 브라운의 모든 저작들을 다시 정리해서 요약하는 글을 서평 쓰는 남자 블로그에 올리려고 합니다. 정확한 시기는 아직 잘 모르지만, 아마 2021년 상반기 말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구독자 여러분에게도 저의 브레네 브라운 읽기가 도움이 되셨기를 바라면서, 다음 달에는 목회 상담학자인 Chuck DeGroat가 이 주제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분석한 책인 Wholeheartedness를 서평하면서 이 주제를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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