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Walking with God through Pain and Suffering)는 굉장히 총체적인 책입니다. 영어 원서로 장장 300쪽이 넘는 이 책은 고통과 고난에 관한 모든 문제를 몇십년에 걸쳐 사역한 목회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한 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실천 신학 교수였던 학자의 관점에서 가능한 한 다 다루어내고자 합니다. 아마 한글로 번역이 된다면 못해도 400쪽은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한 주제를 총체적으로 다루어내려고 하는 책들이 자주 빠지게 되는 함정은 초점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러다보니 너무 중구난방 식으로 내용이 흘러가기 쉽다는 것 외에도 깊이가 얕아진다는 것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함정들을 잘 피해서 고통과 고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떤 의미이며, 어떤 의미여야 하는가를 잘 파헤칠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고통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그 길을 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매우 실제적이면서도 신학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인 관점에서 다룹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애초에 팀 켈러라는 목회자이자 학자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요. 그것은 팀 켈러가 다른 무엇보다 마음(heart)의 문제에 집중하는 목회자라는 점이었습니다. 이 서평에서는 켈러가 바라보는 마음의 문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얘기 외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깊이 새겼던 세가지 주제를 추가해서, 문화, 마음, 지혜, 그리고 현실이라는 네가지 주제를 한 꼭지씩 공간을 내어서 다루어 볼 예정입니다.
문화: 고통과 고난을 다루어내는 방식
켈러는 고통과 고난이라는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곧바로 성경이나 신학으로 직행하지 않습니다. 대신, 문화적 서사의 문제를 먼저 다룹니다. 켈러가 문화의 문제를 다루면서 보여주는 통찰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번째, 모든 문화는 고통과 고난의 문제를 다루어내기 위해서 나름의 서사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현대 서구 문화가 고통과 고난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예리한 자기 성찰, 즉 저명한 종교 사회학자 크리스챤 스미스(Christian Smith)가 도덕적 치유적 이신론(moralistic therapeutic deism)(물론 스미스는 이런 분석을 미국의 십대들에 대한 통찰에 주로 국한시키고 있지만, 십대들이 자라나는 문화의 배양자가 성인들임을 고려해 볼 때, 성인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봄) 이라고 부르는 서구의 문화적 성향에 대한 통렬한 자기 반성과 비판입니다. 첫번째로 돌아가서, 켈러는 크게 고통을 다루는 네가지의 문화적 서사를 나열합니다. 이것은 각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고통과 고난을 어떻게 바라보고 다루어내느냐의 문제이며, 동시에 역사적이고 종교적이며 인류학적인 차원에서의 구분입니다. 첫번째로 도덕적 관점이 있습니다. 이 관점은 주로 고통과 고난을 당한 사람들의 도덕적 과오를 그들의 고통과 고난의 주된 원인으로 돌립니다. 인도 힌두교의 카르마 (환생) 교리를 그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욥기의 세 친구들의 생각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기독교와 유대교 안에도 이런 관점이 있습니다.) 두번째로 자기 초월적 관점입니다. 이 관점은 고통과 고난의 원인이 우리 각자를 만물의 일부이자 전체가 아닌 각각의 개인으로 보는 허상, 그리고 그러한 허상에 따라서 우리 각각의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허상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유일한 탈출구는 그러한 허상을 벗어나서 물질적이고 허망한 것들로부터 마음을 멀리하고, “모든 욕구와 개체성, 그리고 고난이 사라지는 영혼의 평안”을 이루는 것 뿐입니다. 불교의 서사가 이러한 관점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역시 기독교 안에도 이러한 관점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세번째로 운명론적 관점입니다. 이 관점은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거기에 서서 그냥 묵묵히 견디어 내는 사람을 이상적인 존재로 그려냅니다. 따라서 이런 문화적 서사 속에서 가장 영웅적인 인물은 고통과 고난을 수없이 많이 당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그 모든 고난을 견디어 내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 안에는 고통과 고난을 견디어 내는 일에 대한 암묵적인 숭배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근.현대의 한국 문화 안에, 특별히 한국의 기독교 문화 안에 이런 고통과 고난에 대한 암묵적 숭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증명은 이 서평의 목적과도 맞지 않고,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직관적인 판단으로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원론적 관점이 있습니다. 이 관점은 세상을 선과 악이라는 두 동등한 힘이 벌이는 전쟁터로 파악합니다. (이런 면에서 지난 번 융이 지적했던 이원론적인 하나님 이해와 맞아 떨어지는 면이 있지요.) 악은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어찌할 수 없는 다른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들이며, 이런 전쟁은 긍정적으로 보자면 최후의 순간에 구원자가 나타남으로서 종식됩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 이기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고난받는 자들은 악의 힘이 그들을 누르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선의 능력에 참여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기독교에도 이런 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요).
켈러의 판단에 따르면 이런 네가지 관점에는 세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번째, 고통과 고난은 인생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며,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라고 역설합니다. 두번째, 고난받는 자들에게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자기 완성과 영적 성장이라는 더 나은 삶의 견지가 열리게 될 것이며, 고통과 고난은 그러한 길을 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말합니다. 세번째, 그러므로 고통과 고난에 맞서서 각자가 책임을 지는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모든 문화적 서사들은 고통과 고난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긍정적 견지에서 고통과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대처법을 제시한다는 면에서 대체로 서로 통합니다. 하지만 켈러가 바라보기에, 이런 모든 문화적 서사와 완전히 다르게, 하지만 별로 능숙하지 못한 방식으로 고통과 고난을 바라보는 문화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현대 서구의 문화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켈러의 문화적 서사가 고통을 다루어 내는 방식에 대한 두번째 통찰입니다. 즉, 현대 서구 문화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문화적 서사를 짚어내는 것입니다. 켈러에 의하면, 현대 서구 문화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지배적 서사는 고통과 고난은 좋지 않은 것이며,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이미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현대 서구 문화는 고통과 고난을 치료받아야 할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서구 문화는 치료사들과 전문가들이 득세하는 문화입니다. 하지만 켈러는 (같은 서구 문화 속에 존재하는!) 심리학의 연구를 빌어서 이런 문화를 비판합니다. 로버트 스피처(Robert Spitzer) 박사는 심리 상담과 정신 분석에 있어서 거의 표준처럼 여겨지는 DSM-III(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3rd edition: 현재는 5판까지 나왔음)의 특별 위원회를 이끌었는데, 위원회의 DSM-III 완성 이후 25년이 지난 2007년, BBC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현재는 정상적인 반응들이라고 여겨지는 애통이나 비탄, 슬픔, 그리고 근심의 반응들을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정도로 심리적 문제로 바꾸어 놓았는지를 고백합니다. 기자가 “그러면 박사님께서는 일반적인 인간의 슬픔과 그에 대한 반응을 의료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으셨다는 거군요?” 라고 묻자, 이렇게 답합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아마도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인간 반응의 20퍼센트, 혹은 30퍼센트,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릅니다만, 아무튼 상당한 부분을 비정상화시켰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인간 반응의 많은 부분이 개정판에서, 특별히 2013년의 5판에서 고쳐지긴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서구 문화의 고통과 고난을 바라보는 지배적 관점이 바뀌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에 켈러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봅니다.)
자, 그렇다면 서구 문화가 바라보는 고통과 고난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문화적 서사가 있을까요? 물론 이에 대한 쉬운 대답은 기독교 복음입니다. 하지만 켈러는 곧바로 그것이 기독교 복음이라는 답을 내어놓기 보다는, 약간 에둘러서 돌아갑니다. 그리고 켈러가 그렇게 에둘러서 돌아가게 해주는 통로는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여기에는 켈러 나름의 독특한 복음에 대한 이해, 즉 인간의 마음에 닿는 하나님의 해결책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일차적으로는 종교철학에 속한 분야로 여겨지는 신정론으로 향합니다.
켈러는 전체 3부로 이루어진 이 책1부의 마지막 장과 2부 첫 장에서 신정론(theodicy)의 문제를 다룹니다. 신정론은 철학자 라이프니쯔가 처음 만들어낸 말로, 직역하면 “하나님의 방식에 대한 정당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고통과 고난이 왜 인간에게 필요한지에 대해서 소통하는 일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예고했다시피, 켈러의 신정론에 대한 접근은 일반적인 접근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켈러는 애초에 과연 신정론이 우리를 설득하고 변화시킬 수 있느냐의 관점, 어쩌면 지극히 목회적이고 실천적인 관점에서 신정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켈러의 짧은 대답은 “노”입니다. 그리고 켈러가 부정적인 대답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신정론이 사람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켈러가 이해하는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켈러의 마음에 대한 이해를 담은 글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마음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지향점, 우리가 가장 깊이 헌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비유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것들(잠 3:5; 23:26)입니다. 마음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소망을 두는 것이며, 우리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 있는 곳이며, 우리의 상상력을 가장 자극하는 것이 있는 곳(마 6:21)입니다. 모든 마음에는 지향하는 바, 즉 어디론가 향하는 방향이 있습니다(창 6:5). 마음의 방향은 곧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우리의 사고, 느낌, 결정과 행위 모두를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합리적인 것으로, 바람직한 것으로, 이루어낼 만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 속에 가장 아끼고 소중히 다루는 것이 우리의 전인(the whole person)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음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셨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외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쓰지 않으시고, 마음을 최고로 여기셨던 것도 당연합니다 (삼상 16:7; 고전 4:5; 렘 17:10) 선지자들이 구원의 목적을 단순히 법에 따르는 것이 아닌, 영적 갱생을 통해서 마음에 율법이 새겨지는 것(렘 31:33)으로 보았던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결국에는 우리의 마음이 가장 원하는 것을 따릅니다. 팀 켈러 홈페이지, “기독교가 바라보는 마음에 대한 혁명적인 관점”
따라서 켈러는 곧바로 기독교 복음의 서사가 어떻게 고통과 고난을 맞닥뜨리는 우리의 마음에 다가가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켈러의 대답은 고통에 대한 관점과 하나님에 대한 관점에 달려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고통을 정당한 것인 동시에 불의한 것으로,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분이신 동시에 고난 받으시는 분으로 표현합니다 (130).
고통과 하나님에 대한 이 두가지 진리는 모두 기독교 복음의 서사에 기초해 있습니다. 먼저 고통이 정당한 까닭은 우리 인간과 피조계가 모두 타락했고, 그 이후에 세상에는 고통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통이 불의한 까닭은 선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고통이 덜 오는 것도, 불의하고 악랄하게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고통이 더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욥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신 것에는 세속주의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면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성경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모든 것을 당신의 지배와 계획 아래 두시는 분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고난 받으신 하나님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고난을 받으신 적이 없으시다면 고난받고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하나님 자신이 별로 할 말이 없으시겠지만, 그 분 또한 인간의 자리에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고통과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기독교 복음의 서사가 표현한다고 해도, 고통이 가시는 것도, 고난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 속에서 고통 받고 고난 받으며, 여전히 인생은 힘들고 고달픕니다. 그래서 켈러는 지혜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지혜는 머리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가장 깊이 헌신하고 있는 것들이 드러나고, 그것들이 피조계에 있는 것들에서 하나님과 이웃으로 바뀌어 가게 되는 과정이, 즉 내가 사랑하는 것의 우선순위가 마음에서부터 바뀌게 되는 것이 바로 지혜를 얻게 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런 지혜의 기초는 현실을 제대로 보게 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고통이 가져다주는 인생과 삶에 대한 현실. 그리고 그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분을 전지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고난받으신 분이 아닌, 전지전능하신 까닭에 우리와 함께 고난받기로 결정하신 분으로 이해하기 시작할 때 가능합니다. 켈러는 구약과 신약 성경 모두가 말하는 지혜의 기초는 “현실”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것입니다. “현실”은 결코 단면적이지 않습니다. 한가지 관점 혹은 두세가지 관점으로는 현실을 이해할 수도, 제대로 대처할 수도 없습니다. 고난과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과 고통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으며, 켈러는 성경이 그러한 고난과 고통의 다양한 측면들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혜란 “복잡다단한 현실을 한 가지 혹은 몇가지 관점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그 분이 단순히 우리가 꾸며낸 허상 속에서 사는 분이 아닌, 현실과 고난의 복잡다단함을 모두 다 지배하시며 계획하시고 또 그 안에서 함께 고난받으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지혜가 생기는 길을 걷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그 분 자체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를 지혜롭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그렇게 바라보게 될 때에야 우리는 현실과 맞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187)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특별히 서구 사회의 지배적 문화 서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한 서사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 말을 우리가 이야기하는 주제에 적용시키면, 서구인들이 특별히 비서구인들보다 고통이나 고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나 고난을 받을 때 그 고통이나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비서구인들이 서구인들보다 더 그런 부분에서 탁월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비서구인들이 가진 문화적 서사는 적어도 고통과 고난을 인생과 삶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어 준다는 차원에서는 분명히 나은 듯 싶습니다.
고통과 고난이 불의한 것이면서도 정당한 것이라는 관점, 그리고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면서도 고난받으시는 분이라는 관점. 고통에 대한 두가지 모순된 관점도, 하나님에 대한 두가지 모순된 관점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인간은 그 본성상 고통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자신의 머리 안에서 조화롭게 이해되는 관점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데, 성경과 기독교 복음이 제시하는 고통과 하나님에 대한 관점은 어느 쪽도 서로 조화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켈러에 의하면 고통이 불의하지만 정당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또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이신데도 고통과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셨고, 또 그 속에서 스스로 고난받으셨다는 것도, 실제로 고통과 고난을 당해본 사람이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것들입니다만, 또 한 편으로는 고통과 고난을 당해본 사람들만이 그러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걸을 수 있게 됩니다. 현실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머리로, 체계적인 이론으로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 것, 사람의 이해나 체계를 항상 넘어서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팀 켈러가 고난과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주는 목회적 조언은 언제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을 시작점이자 도착점으로 삼습니다.
현실을 맞닥뜨린 인간은 자신이 머릿 속으로 가지고 있던 세상과 현실에 대한 이해나 체계가 실제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충격을 받습니다. 특별히 충격을 받는 부분이 실제로 자신에게 고통이나 고난으로 다가올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얘기했던 고난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실에 직면해야 합니다. 계속적으로 그러한 현실에 직면할 때 거기에 대처하는 마음의 근육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켈러가 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는 단순히 지적인 차원에서 어떤 통찰을 알고 있다는 차원이 아닌, 실제로 마음에 그 통찰이 닿아서 몸을 움직이게 하는 차원까지 내려갔을 때 지혜라고 부릅니다.
이런 차원에서 팀 켈러는 고통과 고난에 대처하는 지혜를 얻어가는 세 단계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 단계들은 여타의 책들이 제시하는 것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다만, 서구 사회가 고통을 대하는 지배적 관점에 견디어 냄이라는 말이 빠져 있음을 지적하면서, 켈러는 자신의 삼단계 대처가 결국에는 고통을 견디어내고 그 안에서 좋은 것들이 나올 수 있게 스스로 버티는 과정에 지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고통을 피한다거나, 줄인다거나 하는 말들이 지배적인 심상으로 작용하는 서구 사회에서 고통을 견딘다는 말이 가지는 무가치함과 무효용성에 맞서서 켈러는 성경이 고통을 견디라는 말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처음에는 고통 앞에서 우는 것입니다. 마음을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쏟아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켈러는 강변합니다. 두번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내가 마음에 두었고 신뢰했던 것들이 민낯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현실을 배우게 됩니다.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전해지는 삶과 존재에 대한 현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분에 대한 현실을 온 몸으로 배우는 단계가 바로 이 단계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 단계는 시간적으로 따로 떨어져서 일어날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모두 다 전인적인 차원의 단계들이며, 모두 다 우리 전 존재를 다 쏟아부어야 가능한 단계들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는 법을 배우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현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지혜를 배우며, 우리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자기 중심성이라는 독약의 효과에서 점차 벗어나게 됩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달라는 차원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자기 중심성이 벗겨지는 기도이며,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고난이라는 현실 앞에 정직하게 서게 만들어주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크나큰 유익이 됩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왜 팀 켈러를 그렇게도 좋아하는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던 책이었습니다. 켈러의 집요한 “인간 마음”에의 추구,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이 바뀌는가를 조사하고 실제로 체험하며 실험하는 과정을 이 책은 잘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켈러 스스로가 갑상선암에 걸려서 수술을 받아본 적이 있기에, 켈러의 아내인 캐시 여사가 크론병에 걸렸었고, 그 병이 심해져서 수술을 몇 차례나 받아야 했었던 기억을 통해서, 또 켈러가 지난 수십년간의 목회 사역을 통해서 만났던 수많은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배우고 깨달은 것을 나누고 있기에 어느 목회자나 신학자에게도, 또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도 추천할 수 있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