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osters of God

수치(shame), 칭의(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 그리고 우상 숭배(idolatry) 사이의 상관 관계를 보여주다—윌리암 스트링펠로우의 자칭 하나님들(Imposters of God)

People serve these idols, and many others like them, to give meaning to their lives, to justify their existence.  They are afraid of death—that is, not only physical death but everything which does or seems to militate against life: alienation, lack of identity, frustration, pain, meaninglessness. And so they grasp, as it were, after aspects of life which seem to promise freedom from some form of death, and serve them as idols.  But what they are really serving is death, for the fear of death is the power behind all idolatry.” (63)

(사람들은 이런 우상들을 섬기며, 이런 우상들과 유사한 다른 우상들을 섬깁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하는 까닭은 자신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이며,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말은, 그들이 단지 물리적인 죽음만을 두려워한다는 말이 아니라, 생명에서 멀어지도록 작동하거나,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예를 들면 소외나 정체성의 부재, 좌절, 고통, 무의미 등을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의 어떤 형태에서 자신들에게 자유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생명의 어떤 면을 추구하며, 그런 면을 우상으로 섬깁니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섬기는 것은 죽음인데, 왜냐하면 모든 우상 숭배 배후의 원동력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63쪽)

윌리암 스트링펠로우의 자칭 하나님들(Imposters of God)은 카톨릭 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수준을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은, 같은 내용을 가지고 스트링펠로우가 시카고 드폴 대학교(DePaul University)의 1968년 멘든홀(Mendenhall) 강좌에서 강연 또한 했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 상아탑인 대학의 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좌의 내용을 기초로 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이 책이 가진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책의 내용이 갈라디아서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스트링펠로우 사상의 토대를 놓는 4부작으로 불리우는 책들—사적이고 공적인 신앙 (A Private and Public Faith),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Count it All Joy), 순종 가운데의 자유 (Free in Obedience), 그리고 이 책 자칭 하나님들( Imposters of God)—은 첫번째 책인 A Private and Public Faith를 제외하면 모두 성경에 대한 스트링펠로우 나름의 해설을 담고 있습니다. Count it All Joy의 경우 야고보서를, Free in Obedience의 경우 히브리서를, 그리고 Imposters of God은 갈라디아서를 토대로 쓰여졌습니다. 이미 서평한 바 있는 사적이고 공적인 신앙(A Private and Public Faith)와 함께, 이 책 자칭 하나님들(Imposters of God)은 스트링펠로우의 사상의 초석 4부작 중 두번째로 서평하는 책입니다.

이 책은 우상 숭배를 다루는 책입니다. 우상 숭배라는 주제에 대해서 제 서평을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이 가장 흔히 떠올릴 수 있으면서도 삶의 본질을 상당히 깊게 꿰뚫어 봤던 책으로 아마 팀 켈러의 내가 만든 (counterfeit gods)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켈러의 내가 만든 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책을 통해서 그 동안 제가 계속 마음 속으로 추측해 왔지만 확실하게 다른 어떤 신학자나 사상가도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았던 관계성, 우상과 칭의, 그리고 수치 사이의 관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서평에서는 스트링펠로우가 어떻게 이 세가지를 연결시킴으로써 우상에 대항하는 삶, 즉 죽음에 빨려들어가지 않는 삶만이 유일한 소망의 삶이라는 점을 역설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먼저 칭의에서 시작하고자 합니다.

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개신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스트링펠로우는 이 칭의 교리가 단지 믿음으로 얻는 개인적인 구원만을 말하는게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인생의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스트링펠로우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In the theology of the Gospel, the event in which God gives and establishes the moral significance of human life in this world is often called justification.  In radical distinction from idolatry, Christians confess that being justified is God’s unequivocal gift to mankind summed up in Jesus Christ.  The worth of a man’s life is bestowed as the gift of God’s wholly gratuitous love for man decisively manifested in history in Christ” (6)

복음의 신학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생의 도덕적 가치를 부여해주시고 세워주시는 사건은 종종 칭의(정당화)라고 불린다. 우상 숭배와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존재 가치가 정당화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아져서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백한 선물이다. 인생의 가치는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이라는 선물로 주어진다.” (6)

말하자면, 칭의란 인간이 자기 존재 가치를 스스로 정당화하려는 시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여전히 자기 존재 가치를 소중하게 다루고 싶은 욕구가 남아 있습니다만, 왜 자기 존재 가치가 소중한지, 그 근본적인 이유는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책 63쪽에서 (이 서평을 시작하면서 인용한대로) 스트링펠로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우상들을 섬기며, 이런 우상들과 유사한 다른 우상들을 섬깁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하는 까닭은 자신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이며,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말은, 그들이 단지 물리적인 죽음만을 두려워한다는 말이 아니라, 생명에서 멀어지도록 작동하거나,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예를 들면 소외나 정체성의 부재, 좌절, 고통, 무의미 등을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의 어떤 형태에서 자신들에게 자유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생명의 어떤 면을 추구하며, 그런 면을 우상으로 섬깁니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섬기는 것은 죽음인데, 왜냐하면 모든 우상 숭배 배후의 원동력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63)

생명이신 하나님에게로부터 멀어진 인간들은 자기 자신들 안에서 생명을 찾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게 되고, 생명과 가까워 보이는 것, 즉 소외가 아닌 것, 정체성 확립을 도와주는 것, 좌절에서 피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고통에서 피할 수 있게 해주는 것, 혹은 인생에 의미를 제공해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렇게 어떻게 해서든지 생명과 가까워지려는 시도를 통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존재에 대한 정당화를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을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찾을 있는 다른 대상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우상이며, 우상을 통해서 자기 가치를 찾으려는 시도가 바로 우상 숭배에 다름 아닙니다. 하지만 우상 숭배를 다루기 전에 살펴야 할 감정이 있는데, 그게 바로 수치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존재 가치를 찾지 못할 때, 혹은 자기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수치를 피하는 일은 동서양 공히 체면을 세운다(saving face)라는 말로 표현되며, 수치를 당할 때 우리는 체면이 구겨졌다 (suffering a loss of face)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스트링펠로우는 우리가 하나님의 칭의하심을 믿지 않고 마땅한 우상을 구하지 못했을 때 우리의 체면이 구겨질 뿐만 아니라, 심하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기까지 합니다. 스트링펠로우가 드는 실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수치(shame)

“I am well acquainted, for instance, with a certain suburban family in Massachusetts, a very status-conscious household… The eldest son of the family, who is to be graduated from high school this year, recently confided in me that he was confronted with a dilemma occasioned by his parents’ insistence that he go to college. The boy is bright enough for college work, but is adamant that he does not want to go to college. He had a strong mechanical aptitude and an enthusiasm for cars and wants to be an automobile mechanic… But his parents are firm. Not only must he attend college, it is mightily important to them that he be admitted to a certain kind of college—Wesleyan or Amherst, say, rather than Northeastern University or the University of Bridgeport.  They feel, he discerns, that they will somehow suffer a loss of face if he does not do so.” (34)

예를 들면, 나는 매사추세츠 주의 어떤 가족을 아는데, 가족은 자신들의 지위를 상당히 의식합니다. 가정의 맏아들은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데, 부모님께서 자신이 대학에 가야한다고 성화를 부리셔서 딜레마에 빠졌다고 저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소년은 대학 공부를 해낼 만큼 명석합니다만, 자신은 대학에 가고 싶지 않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친구는 기계적인 재능이 뛰어나고 자동차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으며 자동차 정비사가 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친구의 부모님은 확고합니다. 친구가 대학에 가야 뿐만 아니라, 그냥 대학이 아니라 웨슬리안 대학이나 앰허스트 대학같은 학교—노스이스턴 대학이나 브리지포트 대학 같은 학교가 아니라—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친구는 부모님들이 만약 친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체면을 구길 거라고 느끼는 같아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34)

자신의 혹은 자기 가족의 존재 가치를 대학의 명성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부모님들은 자신의 아들이 명성 있는 대학에 가지 않고 자동차 정비사가 된다면 체면을 구긴다고 느끼며, 더 나아가 자신들의 존재 가치가 낮아질 거라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의 가치를 정당화하려는 여러가지 시도의 일환이며, 수치심이 그런 시도 속에서 작동하는 기제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상 숭배(idolatry)

스트링펠로우는 우상의 본질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자기 존재의 정당화를 획득하려는 시도”(justification by works)(39)라고 말합니다. 이런 큰그림 하에서 스트링펠로우는 크게 다섯 가지의 우상을 살펴봅니다. 그 다섯가지 우상은 1) 종교(교회), 2) 국가, 3) 인종, 4) 돈과 지위, 그리고 5) 직업입니다. 이 다섯가지가 어떻게 우상이 될 수 있는지, 그 메커니즘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대로 입니다. 인간은 이런 다섯가지를 통해서, 그리고 그 밖에 자신들이 존재 가치를 발견할 만한 모든 것에서 우상을 만들어냅니다. 왜 일중독이 있을까요. 왜 종교 중독이 있을까요. 왜 인종차별주의가 있을까요. 왜 국가주의에 기반한 전쟁이 일어날까요. 왜 돈과 지위가 그다지도 우리 사회에서 중요할까요.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 가치를 구하기 때문이며, 이것들이 사라지면 우리 또한 사라지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서평자로서 저는 특히 스트링펠로우가 말하는 우상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통찰이 많이 와 닿았습니다. 스트링펠로우는 교회를 규정하면서 오순절 사건으로 돌아가며,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교회의 표지로 두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번째는 그가 세속적인 하나됨(secular unity)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두번째는 교회적인 하나됨(churchly unity)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세속적인 하나됨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인종과 종교, 신분과 경제적 지위가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 언어를 말하며 하나가 되는 장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실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즉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됨을 경험하게 되는 곳이 바로 교회의 초기적 장면이며, 오순절 사건은 바로 교회의 그런 면을 부각시킨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두번째로 교회적인 하나됨이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모든 은사들이 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되는 대신, 교회 전체를 세우기 위해서 사용되는 일을 말합니다. 이 두가지를 스트링펠로우는 교회의 표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스트링펠로우에 의하면 교회는 인종적으로, 지위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갈라져 있습니다. 흔히 인용되듯이 미국의 주일 아침 9시는 일주일 중 다른 어떤 날보다도 분리가 많은 때라는 격언은 교회가 오순절에서부터 시작된 자신의 표지인 세속적인 하나됨을 지키기는 커녕, 인종에 따라서, 신분에 따라서, 지위에 따라서 서로 나뉘어서 모이는 우상 숭배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더 나아가 교회적인 하나됨 또한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안타까운 점은, 많은 교회가 그런 행위가 우상 숭배라는 점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트링펠로우가 그리는 현실은 암울합니다. 교회도, 그리스도인도, 누구도 우상 숭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스트링펠로우는 여전히 희망을 말합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 어디인지 알게 된 이상, 희망 또한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대신 생명을 택하는 것,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만이 우리를 진짜 희망을 누리고 바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이 책이 역설하는 바입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그 희망의 창시자가 이미 죽음과 싸워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여전히 우리 앞에 흔들림 없이 서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의미를 알고, 비록 실패를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희망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생명 되신 그 분을 붙잡습니다.

바로 여기서 수치와 우상의 담합이 드러나며, 칭의의 중요성 또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칭의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사람에게 수치와 우상의 담합은 점점 그 세가 약해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길을 모두 걸어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다음 서평은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입니다. 그 때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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